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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가 아니라,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일 뿐

아하레터 2025. 4. 16. 17:06

 

2024년 10월 ‘카이스트 실패연구소’가 실시한 ‘도전과 실패에 관한 대국민 인식 조사’에 따르면 실패가 ‘성공에 도움이 된다’에 동의한 사람(73.5%)이 ‘실패가 성공의 장애물’(26.5%)이라 응답한 사람의 두 배를 넘었다. 그런데 한국 사회 전반이 실패를 어떻게 대하는지 묻자 정반대되는 결과가 나왔다. 응답자의 77.2%가 ‘한국 사회가 실패에 관대하지 않은 사회’라고 답했고 ‘한국 사회는 한 번 실패하면 낙오자로 인식된다’라는 데 58.2%가 동의했다. 이는 실패에 대한 인식과 현실의 간극을 여실히 드러낸다.

 

◾ 실패하지 않고도 실패감을 느끼는 사람들

실패감을 느끼는 사람들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상대적 박탈감’이다. 무언가를 가진 타인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자신이 그것을 얻을 기회를 놓쳤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앞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그 차이를 메울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 잘못됐다는 느낌, 실패한 것 같은 느낌에 빠져드는 것이다.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에 도달할 수 없을 듯한 ‘무력감’에서 오기도 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끊임없는 노력에도 쉬이 얻어지지 않는 보상, 개인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변하는 사회와 점점 더 높아지는 기준은 현재 자신의 역량과 자원이 늘 충분하지 못하다는 느낌,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과 함께 실패감을 만들어낸다.


문제는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이 실제로 실패가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그 자체로 실패를 여러 번 반복한 것과 유사한 부정적 심리 상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실패감에 동반하는 좌절감과 수치심, 무력감 같은 감정은 자기 능력에 대한 의심, 또 다른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새롭고 도전적인 목표를 추구하기보다 더 안정적이고 확실한 성공을 보장하는 선택지를 찾고, 추구하는 목표의 수준을 낮추며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는 등의 행동을 보인다.

 

◾ 사람들이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을 갖는 이유

▪ 실패를 회피하는 문화

한국인이 느끼는 실패감의 배경에는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태도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실패하면 다른 사람의 기대나 관심이 감소할 것에 대한 불안과 중요한 사람을 실망시킬 것에 대한 불안이 실패를 두렵게 만든다. 실제로 개인이 실패로 여기는 경험을 수집해보면 많은 한국인이 타인의 기대나 시선 때문에 원치 않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로 인해 내적 동기 부족으로 과업을 완수하지 못하거나 만족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접한다. 또한 스스로 만족스러운 선택을 했는데도 중요한 타인에게 긍정적 반응을 얻지 못하거나 부정적 반응을 받으면 실패했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타인과의 비교도 실패감을 만들어내는 강력한 도구다. SNS가 보편화된 후, 우리는 전에 없이 다양하고 많은 사람의 존재를 가까이에서 접하며 더 쉽게 타인과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많은 부, 더 많은 성공, 더 많은 행복이 전시되는 SNS 게시물 속 편집된 타인의 모습과 자신의 현실을 비교하는 행위가 상대적 박탈감과 충족 불가능한 욕구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더불어 다른 사람들의 성취와 경험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면서 자신이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는 현상을 초래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트렌드와 기회에 노출되면서 모든 것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 경제적·제도적 압박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가치 기준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판단한다. 한국 사회는 주로 부의 정도, 직업의 사회적 지위, 학업 성취 수준 등 외적·물질적 영역을 중심으로 성공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행복 연구의 권위자 에드 디너 박사는 한국인의 행복도가 낮은 원인으로 이러한 물질 중심적 가치관을 지목했다. 물질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쁘진 않지만, 하나의 가치에 지나치게 몰입하면 사회적 관계나 개인의 심리적 안정 등 다른 가치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되어 행복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흔히 한국 사회의 다양성 부족도 실패를 판단하는 맥락에서 중요하다. 한국 사회 특유의 획일화된 가치관은 개인의 실패감을 강화하는 조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개인에게 사회적 인정을 제공하는 가치의 기준이 다양하지 않으면 특성과 재능이 제각각인 개인의 기여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개인의 고유한 장점을 발견하고 발전시킬 기회도 제한된다. 특히 부와 지위, 학벌 같은 외적·물질적 자원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돌아갈 수 없는 한정된 것이기에, 많은 사람이 불가피하게 실패감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 도전을 막는 사회 구조

한국의 ‘사회적 시계’는 시간에 대한 관점을 좁고 근시안적으로 만든다. 사회적 시계란 특정 사회나 문화 체제 안에서 관습처럼 여겨지는 인생 주기를 말하며 진학, 취업, 결혼, 출산 등 특정 나이대에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발달 과업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타인의 시선과 기준을 중시하는 한국인은 ‘어떤 일을 하기에 늦거나 이른 나이’, ‘특정 나이대에 이루어야 하는 성취’ 같은 연령 규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다수는 사회적 시계에 맞춰 살고자 노력하지만, 특정 나이에 기대되는 발달 과업을 완수하지 못하거나 지연되는 일은 흔하게 발생한다. 이렇게 사회적 시차가 발생하거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수준에 못 미친다고 느낄 때 불안과 조급함을 느끼며 ‘실패한 것 같은 느낌’에 빠질 수 있다.

 

문제는 발달 과업을 완수하는 데 요구되는 자격의 기준과 노력의 양이 과거에 비해 매우 증가했으며 그러한 경향이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오늘날의 청년은 기성세대와 비교하면 같은 수준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 평균적으로 더 긴 시간과 더 많은 비용이 든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청년은 사회적 시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시간을 쪼개어 틈틈이 여러 노력을 채워나가지만, 동시에 지속적인 시간 압박을 느낀다.

 


그러니 청년이 ‘실패하더라도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는 옵션’,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대신 ‘실패할 확률이 적은’, ‘참고할 사례가 많은’ 선택지를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생존에 유리해서가 아닐까. 도전 의식이 부족 해서가 아니라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사회적 편견이 무서워 실패를 회피하고 있을 뿐이다. 실패의 필요를 모르는 게 아니라 실패할 기회를 빼앗기고 있는 셈이다.

 

 

 

📍 출처: 실패 빼앗는 사회 - 카이스트 실패연구소의 한국 사회 실패 탐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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