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우울증이라고? by. 오지은 & 반유화아하 에세이 2025. 5. 28. 18:03
🤦♀️ 우울증 디나이얼(denial)
세상은 우울증 환자가 하루 종일 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마구 슬픈 기분을 느끼는 사람. 하지만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그들을 ‘건강한 정상인’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감정을 건강하게 느끼고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 있어 슬픈 당신… 정상입니다!
수상한 사람들이 문제다. 본인 상태가 수상하다는 걸 모르거나 낌새는 챘지만 부정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수상한 순간이 어떤 때냐 하면… 기력이 없을 때, 다 싫을 때, 공황이 올 때(당시엔 공황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인생에 좋은 일이 일어나도 좋다고 느껴지지 않을 때, 즐거운 것이 없을 때, 감정이 사라진 것 같을 때, 잠을 잘 수 없을 때, 자학이 끝나지 않을 때, 죽고 싶을 때 등등을 말한다. 하지만 역시 어딘가 모호하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타고난 성격인지, 그냥 게으른 건지, 스쳐가는 우울감에 너무 집중하고 있는 건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가 우울증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 더 깊이 생각해보면 어디까지가 정상 범위이고 어디부터가 비정상인지도 알기 어렵다. 대체 얼마나 이상해야 진짜로 이상한 것인가?
조금 오래된 것이지만 믿을 만한 테스트를 하나 가져왔다. 1970년대에 미국국립정신건강연구소에서 만든 역학 연구를 위한 우울척도(CES-D)를 한국의 실정을 고려해 변형한 검사 도구다. 이 스무 개의 문항 중 가장 인상적인 다섯 개를 골라보았다.
- 희망을 잃었다
- 미래가 두렵다
- 내 인생은 실패한 것 같다
- 집중이 되지 않는다
- 무언가를 시작할 수 없을 것 같다저 다섯 개의 문항을 읽고 당신이 어떻게 느낄지 궁금하다. ‘맞아, 우울증이란 이런 거야’라고 생각할지, 아니면 ‘엥? 우울증이 이런 거라고?’라고 생각할지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테스트를 처음 봤을 때 조금 놀랐다. 예상과 달랐기 때문이다. 조금 더 우울증스러운(?) 항목이 있을 줄 알았다. 기분이 나쁘다, 슬프다, 죽고 싶다… 이런 문항만 있을 줄 알았다. 아니, 하루 종일 우는 사람이 우울증 아니야? (그래요.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바로 접니다.) 우울증인 나조차도 우울증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의 실체는 그렇지 않다. 펑펑 우는 슬픈 사람보다 무표정한 사람의 상태가 어쩌면 더 나쁠 수도 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잔잔한 좌절감, 이 상태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패배감, 나아질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 이런 감정들의 핵이 그를 천천히 무너지게 한다. ‘나는 안 돼’, ‘난 나아질 수 없어’ 이런 마음이 어느새 ‘난 그만 살아야겠다’로 바뀌기도 한다. 그게 우울증의 세계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회복탄력성’이 있다. 말 그대로 탄력 있게 회복한다는 뜻이다. 마치 고무줄처럼. 길게, 팽팽하게 당겨졌다가도 원래 모양대로 돌아온다. 크게 좌절할 일이 있어도 많이 울고 푹 쉬면 어느새 괜찮아지는, 사람에겐 그런 힘이 있다. 하지만 그 회복탄력성이 망가진 경우가 있다. 고무줄이, 마음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지나치게 팽팽했던 고무줄이 그만 끊어져버린 것이다. 그런 사람을 환자라고 한다.
당신은 어쩌면 인터넷으로 저런 테스트를 해보고는 결과를 보고 놀라 후다닥 창을 닫고 없던 일로 하고 누워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까먹어버리자. 자꾸 이런 거 보고 그러니까 더 우울해지는 거잖아. 다들 이러고 사는 거잖아. 오버하지 말자.’ 그렇게 부정한다. 우울증 디나이얼로 살아간다.
내가 골절인지, 암인지, 이게 염증인지 그런 걸 스스로 판단하면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는 것처럼 정신질환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혼자 어떤 진단도 내릴 수 없고 내려서도 안 된다. 인터넷에서 우울증 관련 글을 반복해서 찾아보거나 혹은 못 본 척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당신의 상태를 나아지게 하지 않는다. 수상함의 정체를 외면한 채 발만 동동거리는 것이 도움이 될 순 없다.
이 바닥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정신과 문턱을 넘었으면 이미 반은 치료가 된 것이다.” 진짜로 갑자기 반쯤 치료가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병원에 간다는 것 자체가 나아지는 길 위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시작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정신과 의사들도 이 말을 종종 인용하는 것일 테다. 그러니 수상하면 병원에 가자. 그리고 진단은 의사가 내리게 하자. 긴 시간 정신건강의학계가 쌓은 노하우를 조금은 믿어보자. 의사에게 나의 현재를 파악당하자. 이미 준비되어 있는 다양한 도움을 받자. 의사가 그럴 필요 없다고 하면… 시원하게 안 받으면 되지!
👩⚕️ 반유화 선생님의 처방전 “우울함이 계속된다면 병원에서 고통을 점검하세요.”
초진은 대략적인 사실 확인, 즉 주요 증상 및 현재의 스트레스, 기저질환, 식사 및 수면, 가족 구성 등의 파악 위주로 진행되는 편입니다. 한 가지 준비해 오시면 좋은 것은 있습니다. 바로 기저질환으로 인해 약을 복용 중인 경우 어떤 약인지 파악해오는 것입니다. 만약 기존에 정신건강의학과를 내원한 적이 있는 경우라면, 마지막에 복용한 약을 알아 오신다면 진료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됩니다.
병원에 꾸준히 내원하시는 많은 분에게조차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는 ‘나는 사실 우울증이 아니라, 그저 게으른 사람인 게 아닐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이 상황을 우울증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존재하곤 합니다. 그 의구심을 해소하기란 쉽지 않고요. 저는 여기에 대해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게으름이면 어떻고 우울증이면 어떤가요. 그것의 이름이 무엇이든, 분명한 건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은 게으름인지 우울증인지 모를 그 무언가로 인해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에 대해 ‘지속적으로’ 자책의 성격을 띤 의구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오히려 우울의 경향성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병원에 가야 할까요? 그런 말이 있죠. “할까 말까 할 때는 하라.” 병원을 가는 문제는 특히 그러하고, 정신건강의학적 문제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나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문제인데 조금이라도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가는 것이 낫습니다. 살아가면서 오랫동안 쌓아온 빅데이터가 보내주는 신호를 결코 무시하지 마세요.
직관적으로 이해하실 수 있을 만한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만 나열해보겠습니다.
1) 식욕의 증가 또는 감소, 불면 또는 과수면, 집 정리 또는 개인위생 수행이 어렵다.
2) 사소한 일에 화가 나 친구와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끝내거나, 과제나 업무가 점점 더 심하게 밀리고 중요한 일을 놓치는 등 학업, 업무, 관계, 경제적인 이슈에서 문제 발생한다.
3) 병뚜껑이 잘 안 열린다고 ‘한심하네. 죽어야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사소한 단서에도 죽음을 떠올린다.
4) 취미, 여행, 친구와의 만남, 덕질 등 이전에 즐기던 것들이 더는 흥미롭지 않고 감흥이 없다.
5) 지치고 무기력한 느낌, 숨쉴 때 답답하거나 산소가 부족한 느낌, 가슴 두근거림 등의 신체 증상이 발생한다.마지막으로, 병원에 다닌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계시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매우 믿을 만한 사람에게 알렸을 때는 생각 이상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요. 결정이 어려우면 이 문제에 대해 주치의와 상의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 글- 오지은
19년 차 음악인, 16년 차 작가, 11년 차 우울증 환자. 주로 그늘진 마음에 대한 글과 음악을 만들어왔다. 2005년 클럽에서 공연을 시작, 2007년 첫 앨범 〈지은〉을 냈다. 이후 정규 앨범 2장을 더 내었고 오지은과 늑대들, 오지은서영호 등의 프로젝트 활동을 하였다. 2010년 첫 책 《홋카이도 보통열차》를 시작으로 《익숙한 새벽 세시》, 《마음이 하는 일》, 《아무튼, 영양제》 등의 책을 냈다.
- 반유화
16년차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누군가의 생각과 감정, 소소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호기심을 가질수록 치료에 가까워진다는 점에 이끌려 이 길을 선택했고, 진료실 안팎에서 그 마음을 실천해왔다. 내담자들이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친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언니의 상담실》, 《출근길 심리학》을 집필, 출간했다.
✅ 출처: 우울증 가이드북 - 오늘도 우울한 당신을 위한 아주 쉽고 쓸모 있는 안내서
본 사이트에 게재된 콘텐츠는 (주)위즈덤하우스에서 관리하고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되는 저작물입니다. 사전 동의 없는 무단 재배포, 재편집, 도용 및 사용을 금합니다. aha.contents@wisdomhouse.co.kr
'아하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을 망치는 말투 by. 후루꾸 (0) 2025.03.06 평범한 것이 가장 소중하다 by. 집밥 둘리 박지연 (0) 2025.02.19 에드워드 리의 K-할머니와 냄비밥 (0) 2025.01.08 자리를 비우는 하루 by 마야 안젤루 (0) 2024.12.03 산을 이루는 경이의 존재를 감각하는 끝없는 여정 by 낸 셰퍼드 (3) 2024.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