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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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리의 K-할머니와 냄비밥아하 에세이 2025. 1. 8. 10:28
아시아 식탁의 기본이자 선(禪)의 근본인 밥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내 어린 시절의 모든 식사마다 올라오던, 김이 모락모락 나고 쫀득하고 달콤하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밥 한 그릇.기억이라는 건 4~5세부터 시작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맹세컨대 눈만 감으면 이가 하나도 나지 않은 입속에 나를 달래며 넣어주던 따뜻한 전분 덩어리가 선사하는 그 편안한 감각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강건하고 까다로운 우리 가족은 대대로 찰진 밥을 먹고 자랐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밥은 나를 튼튼하고 똑똑하게 키웠고 수학과 과학, 역사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게 했다. 쌀은 내 시력을 예리하게 만들었고 치아는 가지런하게, 손톱에는 윤기가 흐르도록 해주었다. 그땐 착한 일을 하면 매콤한 돼지고기 요리를 갓 지은 밥 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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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비우는 하루 by 마야 안젤루아하 에세이 2024. 12. 3. 19:59
종종 우리는 우리의 일들이, 크건 작건, 사소한 부분까지 지속적으로 손길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세계는 붕괴하고 우리는 우주에서 제자리를 잃을 것이라 믿는다. 이는 사실이 아니며, 설혹 사실이라면 그건 우리의 상황이 어차피 무너지고 말았을 아주 일시적인 상황이었기에 그렇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나는 내게 자리를 비우는 하루를 허한다. 자리비움의 전날 밤, 나를 매어두고 있던 굴레들을 풀기 시작한다. 동거인들, 가족과 친한 친구들에게 24시간 동안 나와 연락이 안 될 거라고 알린다. 그런 다음 전화 연결을 끊어둔다. 라디오 다이얼을 음악만 나오는 방송국으로, 기왕이면 마음을 어루만지는 옛날 명곡들이 나오는 채널로 맞춘다. 아주 뜨거운 물을 채운 욕조에 한 시간 넘게 앉아 있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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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이루는 경이의 존재를 감각하는 끝없는 여정 by 낸 셰퍼드아하 에세이 2024. 9. 25. 17:55
내가 여행에 나선 것은 순수한 애정 때문이었다. 그 애정은 어린 시절 모나들리아흐 산맥 중턱에서 바라본 스고란 두브 너머 협곡의 짙은 보랏빛을 꿈속에 보면서 시작되었다. 손에 잡힐 듯 아른거리는 그 쪽빛 협곡이 나를 평생 동안 산으로 끌어당겼다. 당시 내게 케언곰 산맥에 오른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영웅만이 해낼 수 있는 전설적 과업이었다. 어쨌든 어린아이가 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춥지만 폭설이 그쳐 쾌청하고 눈부시던 10월의 어느 날, 나 홀로 가슴 두근거리며 안 에일레인 호수 위의 크레그 두브에 올랐을 때도 그것은 여전히 전설적인 과업처럼 느껴졌다. 나는 사과를 훔친 아이처럼 겁먹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올라갔다. 케언곰은 여전히 금단의 구역이었지만 내 평생 그 산맥에 그렇게 가까이 간 것은 처음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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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래 걸렸지, 이 모양의 나를 만나기까지 by 김민철아하 에세이 2024. 7. 22. 20:45
여행 초반에는 모두 설렘 필터를 끼고 여행지를 둘러본다. 하지만 설렘은 곧 산화된다. 심드렁 필터의 시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다 떠날 날이 가까워지면 우리는 갑자기 애틋 필터를 장착한다. 나의 여행은 한 번도 이 공식을 벗어난 적이 없다. 두 달의 파리 여행도 똑같은 공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파리와 산뜻하게 이별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할 거라고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정작 겪어보니 참으로 곤란했다. 나는 참으로 파리와의 이별식을 혼자 요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욕심을 다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자꾸 기억하고 싶은 장면들이 나타나니 자꾸 또 욕심을 내게 되었고, 막상 떠난다 생각하니 무엇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아서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길을 걷던 내 눈에 술집 간판 하나가 눈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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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각자 자라는 속도가 다를 뿐 by 이소영아하 에세이 2024. 6. 11. 18:51
어릴 적 명절이 되면 경기도 외곽에 있는 이모집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모집 뒤에는 낮은 산이 있었는데, 산 아래에는 소나무가 많았다. 이모는 추석마다 이 소나무 숲에서 주운 솔잎으로 송편을 쪄주었다. 대학생이 되어 다시 그 소나무 숲에 갔는데, 소나무 중 일부는 리기다소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나무는 한곳에서 잎이 두 개가 나지만, 리기다소나무는 잎이 세 개가 난다. 이들은 1970년대 황폐해진 우리 산에 식재된 속성수 중 한 종이다.속성수는 빠르게 자라는 나무를 일컫는다. 우리 산에는 리기다소나무와 아까시나무, 오리나무 등 속성수가 많다. 1960〜70년대 황폐한 우리 땅을 하루빨리 푸르게 만들어야 했고, 그렇게 심어진 나무가 이제는 아름드리나무로 커버렸다.지구에는 최소 6만 종의 나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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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킬 사람이 오로지 나뿐이라면아하 에세이 2024. 3. 30. 13:35
회사 생활은 아무튼 불행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회생활을 잘해왔는지도 모르겠다. 늘 겉돌았다. 당시에 친한 동료들은 있었지만 회사를 떠난 후 남은 사람은 거의 없다. 대학에서 전공한 분야를 직업으로 택했다면 조금 나았을까. 다른 방향으로 20대를 살 수 있었을까. 월급쟁이라는 건 안정적이기 때문에 중독성이 강하다. 비슷한 일을 끊임없이 해내면 되는 것뿐이고, 이번 달에도 다음 달에도 적지만 고정적인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충분히 안도하고 지내도 괜찮았다.나는 서비스직에 종사했다. 좋은 손님들도 많았지만 나쁜 손님도 많았다. 한번은 어떤 손님과 마찰이 생겼다. 클레임 전화를 응대하던 중 상대방이 내게 심한 욕설을 했고 거기에 발끈해 "욕하지 마세요"라고 한 것이 화근이었다. 남자는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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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쓰’ 술플루언서의 해장법 탐구아하 에세이 2024. 3. 18. 18:37
마시는 일만큼 중요한 게 푸는 일술을 마신다는 건 부정적으로 보면 몸에 독소를 쌓는 일이다. 이 독을 잘 풀어내는 게 옳다는 건 누구나 아는데, 어떻게 풀어내는가가 문제다.나는 술을 마시면 ‘바나나우유’를 마시는 버릇이 있었다. 술을 과하게 마시면 뭐랄까, 장기 안에서 오돌토돌한 염증이 수백 개 나 있는데 그 틈으로 누군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을 뿜어내는 기분이 든다. 그때 바나나우유를 쪽쪽 빨아 먹으면 속의 열기가 가라앉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찾아보니 실제로 우유가 숙취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위벽을 보호하고, 바나나우유 같은 경우엔 당분이 들어 있는데 당을 보충해 숙취 해소에 도움을 준다고.얼큰한 탕은 기분은 개운하지만 국물 좀 마셨다고 숙취가 사라지진 않는다. 하지만 콩나물국은 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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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로북스 운영자 김경희가 전하는 ‘자영업자의 기쁨과 슬픔’아하 에세이 2023. 9. 10. 19:10
“어디 용한 점집 없어?” 친구에게 물었다. 10년 가까이 부천에서 운영하던 서점 ‘오키로북스’를 서울로 이전했다. 동시에 3년 만에 오프라인 서점을 오픈했다. 코로나가 시작될 즈음, ‘감염병 위험으로 한두 달 잠시 오프라인 서점을 쉬어 가야지’ 했던 게 3년간 지속됐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부터 온라인으로 서점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코로나로 인한 타격은 없었다. 오히려 더 활발하게 온라인을 운영했다. 기존에 해오던 책 파는 일뿐만 아니라 책을 기반으로 하는 워크숍을 운영하고 기업들과 함께 일하면서 오키로북스는 조금씩 커나갔다. 그래서였을까? 서울에 오프라인 매장을 내는 일에 조금도 겁이 나지 않았다. 지금껏 잘해왔으니 당연히 잘될 거라 생각했다. 그동안 벌었던 돈으로 멋진 공간을 구했고, 그 안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