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참 오래 걸렸지, 이 모양의 나를 만나기까지 by 김민철
    아하 에세이 2024. 7. 22. 20:45

    ⓒ김민철, 무정형의 삶

     

    여행 초반에는 모두 설렘 필터를 끼고 여행지를 둘러본다. 하지만 설렘은 곧 산화된다. 심드렁 필터의 시기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다 떠날 날이 가까워지면 우리는 갑자기 애틋 필터를 장착한다. 나의 여행은 한 번도 이 공식을 벗어난 적이 없다. 두 달의 파리 여행도 똑같은 공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파리와 산뜻하게 이별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할 거라고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정작 겪어보니 참으로 곤란했다. 나는 참으로 파리와의 이별식을 혼자 요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욕심을 다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자꾸 기억하고 싶은 장면들이 나타나니 자꾸 또 욕심을 내게 되었고, 막상 떠난다 생각하니 무엇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아서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길을 걷던 내 눈에 술집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Demain, C’est Loin.’ 뭐라고? 내일은 아직 멀다고?


    내일은 멀어. 내일은 아직 멀어. 내일은 너무 멀어. 술집 간판이니 분명 오늘 더 마시라는 이야기일 텐데, 내 머릿속에서 이 말은 다른 식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걱정하며 살지 마. 지금 나에게 온 오늘을 살아버려. 내일을 위해 계속해서 준비하고, 내일을 위해 참아야 하는 오늘을 끝내버려. 내일을 위해 오늘 너무 많은 걸 감내할 필요는 없어. 오늘도 인생이야. 아니, 오늘이 인생이야. 머나먼 내일 대신 오늘 하루를 원하는 모양으로 살아버려. 그렇게 원하는 모양의 하루하루가 모이면? 그럼 원하는 모양의 인생을 살게 되는 거야.

     

    하루는 놀랍게도 24시간이나 된다. ‘24시간밖에’가 아니라 ‘24시간이나’. 지금까지는 돌아서면 아침이었고, 또 돌아서면 저녁이었다. 자고 나면 또 아침이라 학교에 가야만 했고 또 출근을 해야만 했다. 매일 같은 모양으로 매일 같은 시간에 집 밖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 안정을 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동시에 불안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건 자주, ‘이 모양으로 사는 것이 최선인가? 이 모양이 내가 진짜 원한 모양이었나?’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했으니 말이다. 수없이 많은 날 동안 그 질문과 마주한 나는, 마침내 다른 모양으로 살아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퇴사를 혼자 조용히 결심하고 난 후, 나는 월급날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지난 20년간 그랬던 것처럼 어김없이 입금된 월급을 보며,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매달 이 돈이 없이 산다는 게 도대체 가능한 일일까, 나는 무엇을 포기하려는 건가, 나는 거세게 흔들렸다. 하지만 월급 때문에 살아보고 싶은 삶을 시도조차 못 한다는 건 더욱 두려운 일이었다. 나는 결단했다. 더 이상 매달의 월급은 없을 것이다. 대신 매일 나에게 24시간이 입금될 것이다. 마음껏 다 써버려도 다음 날이면 다시 24시간이 내 손에 들어온다.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쓰고 싶은가? 그러니까 오늘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두 달 전, 파리의 시간이 내 앞으로 쭉 뻗어져 있었다.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매일 내 마음의 결만 보살피며 그날 하루의 모양을 결정했다. 그 시간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당연한 시간이 아닌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온몸으로 살았다. 이 시간은 내가 마련한 시간이지만, 동시에 이 시간을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도 나의 몫이었다. 꿈을 살기 위해 왔다면 내 꿈에 부합하는 시간을 다름 아닌 내가 만들어내야만 했다. 매일을 살고, 매일을 곱씹었다. 매일의 섬세한 맛까지 다 느끼고 싶어 매 순간 열심이었다.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 지금부터는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내 앞에 펼쳐질 것이다. 결국 내가 기댈 것은 그 시간뿐이다. 정해지지 않은 순수한 상태로 나에게 매일 도착할 24시간. 그 시간을 파리에서의 나처럼 살아보면 어떨까. 내일은 저 멀리 두고, 아니, 내일을 차라리 잊고, 오늘을 살면 어떨까. 매 순간의 결들을 풍성하게 맛보며. 다채로운 감정을 곱씹어 차근차근 알아채며. 조금은 느긋하게, 조금은 고요하게, 훨씬 더 깊게.


    퇴사하는 날, 송별회에서 한 동료가 술에 취해 나에게 물었다. “돈을 얼마나 벌어놨길래 회사를 그만둬요?” 돈을 많이 벌어놔서가 아니라, 돈 때문에 계속 회사를 다니는 건 그만하고 싶어서. 덜 벌어도, 더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싶어서, 라는 나의 말은 영원토록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장황한 이야기를 다 들은 그는, 다시 나에게 물었으니까. “그러니까, 얼마를 벌어놨길래 퇴사를 하냐고요.”

     

    결국 돈이 아니라 시간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안정적인 돈 대신 넘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24시간을 오롯이 내 마음대로 살며, 내가 어떤 모양으로 빚어지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너무 궁금해서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고정된 삶을 지키는 대신 무정형의 시간을 모험하고 싶다. 그렇다면 너무 모든 걸 정하지 않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목표 같은 건 당분간 잊는 건 어떨까. 40년 넘게 정해진 모양대로 살았는데, 앞으로의 모양도 정해져 있다면 조금 슬플 테니까. 무정형인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여, 찬찬히 나만의 하루를 완성해내고 싶다.


    자주 불안할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의심할 것이다. 24시간을 받아 들고 한숨을 내쉬기도 할 것이다. 내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 겨우 이거였나 고민할 것이다. 파리에서의 내가 종종 그랬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치의 반짝임을 챙기려 애쓴다면, 결국은 행복한 인생이라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막막한 만큼 자유로울 것이다.
    고독한 만큼 깊어질 것이다.
    불안한 만큼 높이 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삶을 계속 여행해보고 싶어졌다.
    무정형으로.

     

     

     

    ✅ 글: 김민철. 일상을 여행하며 글을 쓰는 사람. 글을 쓰며 다시 기억을 여행하는 사람. 광고 회사에서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오래 일했다.《내 일로 건너가는 법》《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띵 시리즈 : 치즈》 《모든 요일의 기록》《모든 요일의 여행》《하루의 취향》 등을 썼으며 현재 오독 오독 북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ylem14 유튜브 처리어리)

    ✅ 출처: 무정형의 삶 - 김민철 파리 산문집


    본 사이트에 게재된 콘텐츠는 (주)위즈덤하우스에서 관리하고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되는 저작물입니다. 사전 동의 없는 무단 재배포, 재편집, 도용 및 사용을 금합니다. aha.contents@wisdomhouse.co.kr

    댓글

all rights reserved by wisdomhouse 📩 aha.contents@wisdomhous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