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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친 나에게 작은 쉼표가 되는, 음식 이야기 3
    아하 꾸러미 2021. 9. 3. 09:35

     

     

    노트북을 열고 닫는 것으로

    하루가 분리되는 단조로운 삶이

    계속되고 있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코시국 재택근무에, 나도 모르는 사이 무기력이 찾아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책상 앞에서 밥을 먹고, 그릇을 치운 그 자리에서 일을 시작한다. 어딘가 단절되어 버린 삶에 자신감도 의욕도 성취도 감흥도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지난 한 달 동안 주말만 되면 오후 3시 전에 일어나질 못했다. 딱히 피곤한 것도 아니면서, 침대에 누워선 핸드폰만 봤다. 그러다 하루는 문득 '이렇게 살아도 될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러다가 정말 나, 계속 이렇게 누워만 있는 사람이 되는 거 아냐? 🐑 written by 루비 

     

     

    덜컥 무서운 마음에 침대에서 내려와, 한쪽에 쌓인 분리수거를 정리했다. 언제 이만큼 쌓였을까. 수북이 쌓인 플라스틱 배달용기들. 도저히 한 번에 처리할 수 없어 세 번을 왔다 갔다 하며 버렸다. 자는 것과 먹는 것이 균형을 잃으면 몸이 비상벨을 울리는 거라던데... 탑처럼 쌓인 배달용기를 보며 생각했다. 당장에 무기력을 떨칠 순 없겠지만, 일단 먹는 것부터 다시 세워보자고.

     

    나를 챙기는 1순위는 일단 잘 먹는 것부터다.

     

    신경 써서 먹다 보면 삶의 많은 부분이 해결될 거라고, 오래전 우리 할머니도 말씀하셨지. 오랜만에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점검했다. 계란, 당근과 감자, 애호박 정도. 이번 주말은 시켜 먹지 말고 해 먹어야지. 어떤 걸 먹을까 고민하다가, 힌트를 얻으려고 책장 속에 꽂힌 제목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렇게 꼽은 세 권의 책. 이번 주말엔 이 요리들로 밥상을 차려보기로 한다.

     

     

     

     

     

    토요일 점심, 계란 샌드위치

    달걀과 빵은 맛있어: 달걀 하나로 근사해지는 에그 샌드위치 99

    요리│나가타 유이 저/ 조수연 역│2020

     

     

    어렸을 때부터 계란 샌드위치를 좋아했다. 만들기도 쉽고 호불호가 크게 없는 맛이라 간식으로 자주 먹었다. 근데 이건 나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예전 샌드위치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매출 1위는 에그 샌드위치였다. 다른 샌드위치는 속에 크렌베리도 들어가고 고급진 치즈도 들어가는데, 에그 샌드위치는 간단했다. 빵과 로메인 그리고 으깬 계란과 마요네즈가 섞인 속. 흔하고 또 흔한 평범한 재료일 뿐인데, 오전에만 계란을 두 판을 삶았다.

     

    그게 참 좋았다. 계란 샌드위치는 딱히 샌드위치 전문점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 재료 없이도, 어디서 누가 만들든 비슷한 맛이 나서 좋았다. 특별하지 않고 흔하다는 것, 그래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먹을 수 있다는 것. 그게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달걀과 빵은 맛있어』는 제목부터 귀여웠다. 무기력에 빠진 내 눈에 '계란'이 가장 먼저 쏙 들어왔다. 달걀 하나로 근사 해지는 에그 샌드위치 레시피가 99개나 들어있다니. 그 흔한 재료가 99개나 변주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달걀을 빵 사이에 넣고 얹고 적시고 조합하고. 같은 재료라도 만드는 방법과 보조 재료에 따라 다른 요리가 된다니. 냉장고에서 흔하게 보는 재료라서 계란이라면 이미 뻔히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나 세상은 나의 생각보다 크다.

     

    토요일 점심으론 익숙한 계란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평소엔 포크로 성큼성큼 으깨선 버무려버리는데, 오늘은 책에서 소개한 것처럼 고운 채에 걸러 매끈하게 만들었다. 얇은 식빵에 스프레드처럼 균일하게 올려 펴 바르곤 보기 좋게 테두리도 잘라냈다. 그리고 한 입. 분명 내가 아는 샌드위치 맛인데 입안 가득 부드럽게 퍼진다. 같은 재료인데, 이런 부드러움도 나다니. 책에서 알려준 것처럼, 서둘러 콘 옥수수를 꺼내 계란과 섞어 먹어보았다. 같은데, 달랐다.

     

    평범하고 단조롭다고만 생각했던 하루도 어쩌면 99개의 변주가 있을지도 모른다. 매일 조금씩 다르면서 그냥 똑같은 하루라고 내버려 둔 건 하루 쪽이 아니라 어쩌면 내 쪽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오랜만에 생각했다. 계란이 톡 깨지는 것 같은 깨달음이었다. 흔하디 흔한 계란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래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일요일 점심, 감자 듬뿍 넣은 카레

    오늘의 기분은 카레

    에세이│노래 지음│2020

     

     

    무기력은 일상뿐 아니라 업무의 영역에서도 찾아왔다. 일을 해야 하는데, 평소와 다른 강도로 하기 싫었다. 매일 선택을 하고 보고를 하고 또 책임을 져야 했는데, 하고 있는 모든 일이 의미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컴퓨터 앞에서 앉아서 일을 하고 있긴 한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싶고..

     

    분명 나는 호기도 많고 좋아하는 게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무기력은 나를 단단히 잠가버렸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좋아할 때 어떤 사람이었는지 희미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작은 일에도 자꾸 실수를 하고, 그 실수는 오롯이 나의 평가가 되었다.

     

    『오늘의 기분은 카레』의 저자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업무 환경 속에서 나만 뒤쳐지는 게 아닐까 종종 두려웠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카레를 만나곤, 단박에 카레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고. 그렇게 일 년에 300번 정도 카레를 먹는 사람이 되었다는데, 세상에. 좋아서 질리지도 않고 더 행복해졌다는 그의 고백을 읽는데, 무언가를 좋아하는 반짝 반짝이는 마음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확실하게 무언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숨어있던 용기가 고개를 내민다. 세상에 나온 용기는 좋아하는 무언가를 위해 세상의 크고 작은 행복을 수집한다. 마치 카레를 먹으며 기록했다는 저자처럼. 저자는 카레를 좋아하게 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내성적인 성향임에도 옆 사람에게 카레를 좋아하는지 물어보고, 카레 책을 만들어 북토크와 페어도 나가며 세상을 확장시켰다고.

    지난 삶은 ‘○○ 같아요’로 가득했다. “좋은 것 같아요.” 이상할 건 없으나 조금 자신 없어 보이는 말이다. 카레를 좋아하게 되면서, 적어도 카레를 이야기할 때만큼은 ‘같아요’를 붙이지 않기 시작했다. “카레가 좋아요”라고 말할 수 있다.

    다양한 카레 안에서도 나의 취향을 분명히 말한다. 단맛도 좋지만, 요즘에는 감칠맛과 신맛이 강한 카레가 좋다. 카레 덕분에 분명해진 말투를 회사에서 써보기 시작했다. ‘좋은 것 같아요’ 대신에 되도록 ‘좋겠어요’나 ‘좋다고 생각해요’를 쓴다. 작고도 큰 변화다.

    - <오늘의 기분은 카레> p. 56 중에서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마음. 너를 만나 삶이 확장되고 넓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 읽는 내내 저자의 마음이 너무나 반짝거려서 부럽고 부럽고 또 부러웠다.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는 반짝임이 나를 깨우는 것 같기도 했다. 나에게도 저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저렇게 귀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무기력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던 마음속에 생각들이 마구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우습게도 표지의 주의 문구처럼 입맛이 돌기 시작했다. 카레, 감자를 팍팍 넣은 카레를 먹어야겠어.(표지에 이 책을 읽으면 카레가 먹고 싶어진다는 주의 사항이 적혀있다.) 누군가가 좋아하는 걸 먹어보면 나에게도 작은 힘이 생길지도 몰라!

     

     

     

     

     

     

     

    일요일 저녁, 되짱게(된장 찌개)

    할머니의 요리책

    음식 에세이│최윤견, 박린 지음│2019

     

     

    할머니는 된장찌개를 유난히 잘 끓이셨다. 넣은 건 별로 없는데 국물이 구수하고 담백한 게, 계속해서 손이 가는 맛이었다. 좁은 부엌에서 내가 오는 시간에 맞춰 푹 끓이던 된장찌개. 할머니 집에 도착하면 풍기던 된장 냄새. 벌써 못 먹은 지 일 년이 넘어가는 찌개가 요즘 문득 생각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 책을 꺼냈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허할 땐 따습고 든든한 것에 자연스레 손이 가는 법이니까. 『할머니의 요리책』은 3년 동안 손녀가 할머니 곁에서 기록한, '최윤건' 할머니의 레시피가 담긴 책이다. 어렸을 때부터 손녀는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밥을 먹고 자랐다며, 할머니의 레시피를 삐뚤빼뚤한 할머니의 글씨와 손녀의 그림으로 완성했다.

     

    요리 목록은 단출하다. 오이김치, 백숙, 식혜, 곰국. 어렸을 때 우리 할머니가 해주셨던 목록들과 닮아 있어 뭔가 마음이 뜨끈했다. 할머니의 방법대로 손녀와 대화하듯 적은 기록들, 그리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며 책에 담은 손녀의 시선. 책 속에 담긴 두 사람의 사랑을 보고 있자니, 어느 날 내가 먹은 할머니의 요리들이 떠올랐다. 

     

    "할머니, 된장찌개 어떻게 만들어?"라는 질문에 "쉬워. 된장 넣고 두부 넣고 보골보골 끓이면 되지."라고 할머니는 참 쉽게 대답하셨다. 우리 동네는 오후 4시쯤 '댕~ 댕~.'하고 뜨뜻한 두부가 실린 트럭이 왔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할머니가 5층에서 내려가는 사이에 두부 아저씨가 그냥 떠날까 봐 나는 책상 위로 올라가 창문을 열고 "두부 아저씨 기다려 주세요!"라고 소리치고는 했다.

    - <할머니의 요리 책> 36쪽 중에서

     

    예전에 냉동실에 얼려 두었던 국물용 팩 하나를 물에 넣고 보글보글 끓였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싶다가, 손녀가 할머니의 레시피를 그려준 그림을 보며 더듬더듬 순서를 따라간다. 국물을 10분 내고 건진 다음, 된장을 채에 걸러 내리기. 양파는 네모 모양으로, 애호박은 반달 모양으로. 쉽게 그려진 그림을 따라가다 보면 꼭 글씨가 없어도 레시피가, 그리고 된장찌개를 만드는 할머니의 손길이 보이는 듯했다. 사랑한다, 응원한다, 힘내라. 말하지 않아도 찌개 하나로 다 전해지던 그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것 같다.

     

     

     

    이렇게 읽고 먹다 보니 주말이 끝났다.

     

    오랜만에 배달과 인스턴트 없이 부지런히 해 먹었다. 물론 요리할 때마다 설거지가 잔뜩 쌓였지만, 무기력이 사로잡은 날들엔 설거지만 해도 뭔가 흥이 붙었다. 이거라도 했다는 마음과 조금씩 회복의 시작이라는 마음이 번갈아 들어 오랜만에 복작복작한 하루를 보냈다.

     

    무기력함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좀 가벼워진 기분이다. 나를 챙기는 1순위는 일단 잘 먹고 잘 자는 것부터. 단단한 기반이 다져야 그 위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쌓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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