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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워드 장악력을 기르자 by 김도영
    아하 스토리 2023. 5. 6. 16:32

     

    주니어였던 시절,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나름 일에 재미를 붙이고, 제가 만들어가는 기획물들에 좋은 평가가 쌓여가고 있다고 생각될 무렵이었죠. 그때 제겐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제가 보고를 할 때마다 상위 조직장을 맡고 계신 센터장님께서 거침없이 태클(?)을 거는 지점이 있었거든요. 그건 다름 아닌 단어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사용자들에게 더 나은 '가치'를 줄 수 있다고 하셨는데, 도영 님이 생각하시는 '가치'가 뭐죠?"

    "방금 설명하신 것 중에 시장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부분이요, 그럼 도영 님이 정의하는 '공감'은 무엇인가요?"

     

    , 정말 노이로제라는 게 이렇게 오는 거구나 싶더라고요. 전반적인 보고 내용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 유독 회의가 끝날 무렵 제가 사용한 단어 하나씩을 딱 집어 '무슨 뜻으로 그 단어를 사용한 거냐?'라고 물을 때는 식은땀이 다 났으니까요. 매번 회의에 들어가기 전 '오늘은 또 뭔가 지적당할 단어가 없나' 살피기를 반복할 때쯤 센터장님이 저를 불러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매번 단어 가지고 지적하니까 짜증 나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저희처럼 기획하는 사람들은 절대 단어 뒤에 숨어서는 안 돼요. 그냥 느낌가는 대로 쓰는 단어들, 멋있어 보이려고 추가하는 단어들 하나 때문에 우리 뒤에 있는 디자이너, 개발자는 물론이고 세일즈를 담당하거나 사용자 접점에서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 분들은 완전히 혼동을 겪을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 기획자는 자기가 쓰는 단어에 책임을 져야 해요."

     

    그제야 모든 오해가 풀렸습니다. 그토록 단어 하나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왜 사용했느냐'고 물었던 센터장님의 의도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날부로 제 마음속에는 작은 목표가 하나 생겼습니다.

    나는 매일매일 키워드 장악력을 키워가야겠구나!’라는 거였죠. 더불어 이 목표는 지금껏 저를 기획하는 사람으로 살게 해준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정리한 키워드를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

    제가 생각하는 키워드 장악력이란 특정한 단어를 내 관점에서 바라보고 재해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 남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뜻 위에 내 나름대로 정의한 의미 한 줄을 보태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이렇게 단어를 점차 내 것으로 만들어갈 줄 아는 역량은 기획을 하는 데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것을 발굴하고 또 쌓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 개념을 잘 정리하고 확립하는 게 필수적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단어의 뜻을 공부하겠다며 사전만 끼고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무엇보다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공부하는 것만이 키워드 장악력을 높이는 방법도 아니니 말이죠

    그래서 저는 오늘 기획하는 사람으로서 이 단어를 잘 주워 모으고 또 관리하는 것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STEP 1  Keyword Floating – 관심 가는 키워드는 수면 위로 띄워 놓기 

     

    키워드 장악력을 기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관심 가는 키워드를 선정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 별거인가 싶겠지만 생각보다 만만치 않고 또 단순하지 않은 작업이죠

    제 경우에는 최근의 관심사나 근래 봤던 콘텐츠 중에서 저를 자극한 단어에 집중합니다. 영화 속 대사 한 줄로부터 발견한 단어일 수도 있고, 마음에 드는 브랜드의 상품 소개서에서 뽑아낸 키워드일 수도 있죠. 평범한 일상 속 조금이라도 특별해 보이는 단어를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의도적으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단어들은 회사 책상 앞에 작은 포스트잇으로 붙여놓기도 하고 핸드폰 바탕 화면에 메모 위젯으로 고정해 놓기도 합니다. 그 키워드와 여러 번 반복해 마주함으로써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들을 떠올려 보는 것이죠. 마치 특정한 단어를 가슴에 품고 일정 시간을 살아보는 거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STEP 2  Keyword Pairing - 키워드와 어울리는 다양한 경험들을 골라보기 

     

    하지만 키워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고 해서 저절로 키워드가 새롭게 정의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시선으로 키워드를 탐구하는 노력이 필요하죠

    맘에 드는 키워드를 수면 위로 끄집어냈다면 이제 그 참뜻을 파악하기 위해 좋은 짝을 만들어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경험, 어떤 콘텐츠, 어떤 생각과 페어링을 이루면 내가 선정한 키워드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해 보는 거죠. 물론 여기엔 제한된 형태가 없습니다. 드라마나 만화가 될 수도 있고, 특정한 공간이나 도시를 방문해 볼 수도 있는 거고, 혹은 한 인물이 하는 이야기나 활동을 따라가 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저는 책을 좋아하다 보니 일단 어떤 키워드를 선정하든 그에 관한 책을 서너 권 읽어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다 보면 책 속에서 발견된 단서를 따라서 추가로 해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더라고요. 또 한 키워드에 대해 반대되는 시각의 책들을 여러 권 섞어 읽으면 양쪽의 이야기를 균형 있게 들어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꼭 책으로부터 그 키워드에 대한 지식을 쌓는다는 개념보다는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해 가며 그림을 그려간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는 거죠

     

     STEP 3  Keyword Making - 내가 발견한 의미를 한 줄로 정의해 보기

     

    STEP 2의 단계가 다른 사람들이 그 키워드에 대해 정의해 놓은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었다면, 이제 나 스스로 해당 단어의 의미를 정리해 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타인의 관점을 빌려 내 관점을 점점 또렷하게 만드는 것이죠

    이때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내가 경험한 콘텐츠나 활동들에 대해 간단한 회고를 남겨보는 것이 좋습니다. 항목마다 어떤 점이 좋았고 어떤 부분이 아쉬웠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써보는 거죠. 사실 이 포인트가 굉장히 중요한데요, 이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나는 이 키워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어떤 접근이 더 잘 맞는지, 어떤 포인트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기하게도 좋았던 부분들을 하나로 합쳐보면 자연스럽게 큰 공통점들도 드러나게 되고요

     

    그런 다음엔 내 나름대로 그 키워드를 한 줄로 정의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제 경우에는 해당 단어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먼저 써놓고 그 아래 제가 새롭게 정리한 의미를 추가해 작성하는 방식을 즐겨 씁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 위에 제 관점에서 해석한 부분을 덧붙이는 것이죠. 그럼 마치 진짜 사전에 제가 발견한 의미가 한 줄 더해진 느낌마저도 듭니다. 그리고 저는 이 과정이 우리가 그 키워드를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는데요, 이렇게 정리한 의미가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언제든 업데이트할 수 있는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로 사전적 정의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조금씩 그 의미와 해석이 업데이트되는 것처럼 우리의 관점과 경험 또한 계속 넓어지고 깊어질 테니, 그때마다 내가 정리한 의미가 지금도 유효한지를 확인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우연히 어떤 콘텐츠를 보다가도 ', 그때 고민했던 키워드를 이것과 연결해 볼 수 있겠다' 싶으면 과거의 키워드 노트를 다시 꺼내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저는 요즘 이런 키워드를 장악해 보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내용들을 좀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도록 최근 제가 하고 있는 키워드 장악 활동(?) 중 하나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나름 10년 넘게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수많은 기업의 흥망성쇠는 물론이고, 한 개인이 뜨고 지는 광경 역시 여러 번 목격하게 되더라고요. 때문에 올해 초부터 제 그물망에 들어온 키워드는 바로 '생존'이었습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저는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죠

    그래서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자신의 역량과 업적을 쌓아온 분들의 책을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도 저는 그냥 책을 펼쳐 들기보다는 '생존이라는 필터를 통해 이분들을 바라보자'라는 목표를 정하고 읽어나갔죠

    남들은 퇴사를 해도 모자랄 나이에 구글 디렉터가 되셨다는 정김경숙 님의 자전 에세이 계속 가봅시다 남는 게 체력인데를 시작으로, 비록 본인은 그 분야에서 살아남지 못했지만 아들을 월드 클래스 축구 선수로 성장시킨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 님의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어떻게 하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길 수 있는지를 고찰한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 등을 포함한 여러 권의 책이 목록에 올랐습니다.

    또 성장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들을 골라보기도 했죠. 한 인물과 그 주변 환경이 성장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다룬 보이후드라는 작품도 보고, 뜨고 지기를 수없이 반복해 한국 스타트업의 초상이라고 불리는 모빌리티 서비스 타다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도 봤습니다. 외근차 방문했던 명동과 압구정 로데오길이 또다시 주목받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공간에서의 생존을 고민해 보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제 키워드 사전에는 생존이 이렇게 정리되기 시작했습니다.

    - 사전에서의 정의: 살아있거나 혹은 살아남음을 뜻하는 것 

    - 내 관점에서의 정의: 주변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나다운 자생력을 갖추는 것

     

    그러니 혹시 앞서 소개한 그 센터장님께서 '도영 님이 생각하는 생존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으신다면 아마도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내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나다움'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존이 뭘까 고민하다 보니 결국 내 주위의 것들이 살아가는 방법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더라고요"라고 말이죠

     

     

    내 손 위에 올려지는 단어들

    장악이란 말은 손바닥 장(), 쥘 악() 자를 써서 말 그대로 내 손으로 뭔가를 쥔다는 뜻입니다. 제가 키워드를 다루는 데 있어 장악이란 표현을 쓴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죠. 누군가의 어깨너머로 보면서 '그냥 그런가 보다'라고 받아들일 때와, 실제로 그것을 내 손 위에 올려 촉감과 무게와 온도와 생명력을 느껴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거든요

    그러니 단어 또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어떤 단어를 다른 사람의 생각 너머로 마주할 때와 내가 손을 뻗어 직접 만져볼 때는 분명 다른 경험과 다른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줄 테니 말이죠. 그리고 그때 느낀 것들에 대한 감상을 한 줄씩 정리해 볼 수 있다면 우리 각자만의 작은 사전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도 싶어요. 늘 신선함을 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결국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을 어떤 관점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잖아요. 따라서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작은 실천은 '단어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저는 긴 프로젝트가 하나 끝나거나 혹은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점에는 이런 방식의 리뷰도 해보고 있습니다. '나는 올해 혹은 이번 활동을 통해 몇 가지의 키워드를 손에 쥐어봤을까?' 하고 말이죠. 그중에는 제법 또렷해진 단어도 있고 여전히 오리무중 상태에 있는 단어들도 있지만, 무엇인가를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드는 경험은 정말 기대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속는 셈 치고 한번 실천해 보시면 어떨까 싶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수없이 많이 사용될 단어들에 내 나름의 의미를 추가한다는 건 꽤 의미 있고 소중한 시도니까 말이죠. 모쪼록 여러분의 손에 다양한 단어들이 쥐어지길 진심으로 바라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은 아닐까 싶네요.

     

     

     


    글. 김도영

    『기획자의 독서』, 『브랜드로부터 배웁니다』 저자이자 네이버에서 브랜드 경험 기획을 담당하고 있다. 브랜드가 좋아서 브랜딩 일을 하게 되었고, 브랜딩을 하다 보니 브랜드는 더 좋아졌다. 그렇게 일에서도 생활에서도 브랜드를 가까이하며 사는 삶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누군가의 정보를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내가 먼저 경험하고 확신한 것들을 다시 내 이야기로 풀어놓는 것을 즐긴다. 이 과정에서 생겨나는 모든 순간을 소중히 챙기고 간직하려 한다. 세상의 모든 콘텐츠를 사랑하지만, 그 중에서도 ‘글’을 가장 좋아한다. 솔직하게 써 내려간 내 글들이 작게나마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때 진정으로 행복하다. 어렵지 않게, 지루하지 않게, 비슷하지 않게 쓰고자 지금도 열심히 노력 중이다.

     

    연재를 진행합니다

    <기획자의 수집>을 주제로 김도영 작가의 글이 매월 1회 연재됩니다.(총 3회)

    1화. 넘쳐나는 인풋,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2화. 키워드 장악력을 기르자(현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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