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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이 아니면 뭐 어때 by 한 대리 작가
    아하 에세이 2021. 2. 10. 09:30

     

     

     

    매 년 돌아오는 한 해 목표 수립을 위한 면담 시간이었다. 부장이 자기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은 종이들 위에는 우리 부서원들 각자의 다짐들이 적혀있었다. 그중 유독 한눈에 보기에도 텅 비고 무성의해 보이는 종이가 바로 내 것이었다. 조금 머쓱해져서 공연히 귀를 긁어대는 나를 발견한 부장은 노트로 종이를 가렸다. 
            
                한 대리 올해 다짐은 참 심플하네. 일하다가 어려운 거 있으면 얘기하고요.
                네… 
           

        도망치듯 자리로 돌아와, 내가 하는 말이라면 언제든 무엇이든 그렇다고 해주는 참을성 좋은 친구 연의 이름을 급하게 찾아 말을 걸었다. 
                
                너희도 한 해 시작할 때 업무 계획 같은 거 세우니? 어차피 맨날 똑같은 일 시키면서 무슨 계획을 세우라고 하는건지 모르겠네. 진짜 무의미하지 않아?
            
       어쩐 일인지 연은 답이 없었다. 마음이 쓸쓸해져 조금 전에 부장이 들여다보던 업무 목표 시스템을 열고 그동안 내가 적어두었던 새해 목표들을 훑어보았다. 무려 여덟 해의 다짐들을 훑어보는 동안 실소가 났다. 아주 조금도 실행에 옮긴 게 없었다. 
            
        매일 전화영어를 해서 비즈니스 수준의 영어 회화를 가능하게 하겠습니다. 
        엔지니어들과 대화가 가능하도록 코딩을 배우겠습니다......
            
        올해에도 코딩 적으려고 했는데 작년에 이미 써먹었네, 하고 중얼거리는 순간 반갑게 메신저가 깜빡거렸다. 연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언니ㅋㅋㅋ 나 그래도 그거 덕분에 작년에 영어 등급 땄잖아. 자기계발 같은 건 주변에 소문내야 더 잘 실천하게 된대. 나도 주변에서 누가 자꾸 물어보니 공부하게 되더라고.
                아……그래? 야 축하해.
            
        당연히 내 얘기에 동조해 줄 것 같던 연이 이렇게 나오자 나는 일순 쑥스러워졌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괜히 마음이 심란해 뒤적뒤적 서랍 정리를 시작했다. 쓰지 않는 건 다 버려야지. 하지 않을 일들은 그냥 포기해야지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서랍에서는 숨겨놨던 아이템들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으로 책을 내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출력해보았던 테스트 인쇄본,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의 집’을 보다 충동구매했던 스페인어 학습지 시리즈, 여전히 틈날 때마다 꺼내서 조금씩 매만지고 있는 우드 카빙 키트, 주변 사람들에게 보내주려고 사두었던 작은 선물과 쓰다 만 편지들, 그리고 어린 시절 사진들.
            
        유치원 사진 속 나는, 내가 처음으로 만든 멸치볶음을 시식하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간을 얼마나 짜게 했는지 아무도 먹지 못했었는데 뭐가 그리 신났는지 나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내 인생의 첫 요리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시작은 그 자체로 짜릿한 일이었다. 처음으로 종이학을 접을 줄 알게 되었던 날 신이 난 나는 손끝이 붉게 물들 때까지 하염없이 학을 접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구구단을 다 외웠을 때에 봤던 아빠의 환한 미소도 기억한다. 아빠는 내가 셈이 빨라서 훌륭한 수학자나 과학자가 될 거랬다. 나도 그 얘기를 믿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종이접기나 구구단 외우기 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들을 해내야만 했다. 몇 년을 공부해도 여전히 영어는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았고, 온 동네방네 소문을 내며 시작했던 코딩 공부는 ‘헬로 월드’를 겨우겨우 보는 것으로 끝이 났다. 시작만 해 두고 채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은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처럼 마음 한 켠에 남아 잊을 만 하면 나의 신경을 긁어댔다. 
            
        하지만 새해 다짐만 하지 않았을 뿐 나는 주변 그 누구보다도 결심을 자주 하는 사람이었다. 혹시 실패할까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내 인스타그램 계정은 다섯 개쯤 된다. 원래 계정, 작가 계정, 그림 올리는 계정, 일기 쓰는 계정. 열 살도 넘은 블로그에는 ‘오늘부터 블로그를 시작합니다’라는 글만 서너개쯤 되었다.
            
        하지만 이 뒤죽박죽 속에서도 결실을 본 것들이 있었다. 충동적으로 등록한 책 만들기 클래스를 몇 번이나 포기할 뻔 했지만 어찌저찌 마무리 해 책을 한 권 만들어냈다. 멋지게 뭔가를 뚝딱 만드는 개발자는 되지 못했지만 책의 도입부만 몇 번 읽었더니 어느 정도 풍월은 읊을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사랑했던 모든 시작은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때에 나를 다시 사랑해 주곤 했다. 그 사랑은 어느 정도 운명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시작한 줄도 잊 있던 어떤 일들이 ‘나 잊고 있었지?’ 하는 것처럼 다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거 하려고 했던 거 알고 있어, 잊고 있었겠지만 다시 시작해보자고.“
            
        나의 수많은 결심들이 조금 덜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무런 다짐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 실패도 없었겠지. 그런 삶은 아쉽지도 슬프지도 않았을 테지만, 조금 덜 흥미로웠을 거다. 
            
        먼지를 소복이 뒤집어쓴 서랍의 제일 구석진 곳에는 올해부터 꼭 운동을 하리라 다짐하며 사두었던 줄넘기가 들어있었다.  딱 오백 개만 넘을까 생각하며 집을 나서려다 미세먼지가 ‘최악’인게 생각나 포기했다. 또 우울해질 법도 한데 어쩐지 기분이 크게 나쁘지 않았다. 오늘이 아니면 뭐 어때, 내일이어도 괜찮다. 아니면 모레이거나. 어쩌면 내년이 될 수도 있지만 괜찮다. 완성이 언제인지는 조금 덜 중요하다. 시작하기로 했으니까.


     

     

     

     

     

      글. 한 대리

     

    매일 피피티를 아주 많이 만든다. 어쩌다 보니 처음 입사한 회사에 꽤 오래 다니고 있다. 오랫동안 우울증과 불안 장애를 앓았지만, 일은 나름대로 잘한다. 편안하고 마음이 넓은 어른이 되는 것이 꿈이었으며, 지금도 이 꿈을 이루기 위해 꾸준히 애쓰고 있다.

     

    <불안 장애가 있긴 하지만 퇴사는 안 할 건데요>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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