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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점을 ‘매일’에 찍지 말고 ‘한다’에 찍자 by 이유미
    아하 에세이 2021. 5. 17. 17:37

    ©밑줄서점 인스타그램


    작년 말이었나. 내가 운영하는 동네서점 바로 옆에 카페를 차린 언니가 음료 메뉴를 적어놓는 입간판을 살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냉큼 끼어들어 말했다. 


    “언니, 사사. 칠판처럼 생긴 걸로.” 


    언니는 유독 쓰기와 그리기에 취약한 사람이었고 입간판을 사고 나면 그 일은 고스란히 내 차지가 될 걸 뻔히 알면서도 언니를 부추겼다. 


    “그럼 네가 쓸 거야? 다른 카페처럼 음료 그림도 좀 그리고, 응?” 


    내 예상이 맞았다. 언니의 그림이 거기까지 그려지자 나는 조금 망설여졌지만 나의 큰 그림도 있었기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의 큰 그림은 무엇인가. 바로 공짜로 입간판 하나를 건지는 거였다. 그즈음 책방에도 칠판처럼 생긴 입간판을 하나 놓고 싶다 생각했었고 가격을 알아보니 만만치 않았다. 하루에 손님이 한 명도 안 오는 날이 부지기수인 책방주인이 사기에는 다소 무리인 금액이었으므로 나의 노동력을 칠판 값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그럼 조건이 있어. 책방 것도 하나 사줘. 그럼 내가 카페 것까지 책임지고 쓸게.” 그래도 명색이 카피라이터이자 작가인 내가 카페 입간판 문구 하나 못 쓸까? 싶어서 너스레를 떨었다. 언니는 내 조건을 수락했다. 

    다음 날, 검색조차 귀찮아하는 언니를 대신해 나는 직접 입간판을 찾아 나섰다. 원목으로 만든 칠판형 입간판이었고 양면으로 쓸 수 있었다. 가격은 7만원. 언니에게 링크를 보내며 두 개 사는 거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주문한지 하루 만에 튼튼한 입간판이 배송됐다. 난 아직 쓸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라며 조금 당혹스러워 하는 사이 포장이 말끔히 벗겨진 간판 두 개가 내 앞에 나란히 세워졌다. 

     

    일단 카페 간판부터 작성하기로 하고 함께 배송된 색분필을 꺼냈다. 이게 뭐라고. 갑자기 쓰려니 뭘 써야할지 막막했다. 진짜 그러기 싫었는데 검색창에 ‘카페 문구’라고 쳤다. 정신을 차린 나는 그냥 솔직하게 적자,라고 마음을 바꾸고 한쪽에는 카페에서 밀고 있는 음료 메뉴 이름과 가격을 적고 한쪽에는 ‘지금 산책 가는 길이세요? 따뜻한 아메리카노 어떠세요?’라고 적었다. 카페 앞을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기에 그리 적었는데 말할 수 없는 창피함에 한동안 고개가 안 들어졌다. 

     

    책방 입간판은 명확한 컨셉이 정해져 있었다. 색분필을 꺼내 제목을 적었다. ‘오늘 밑줄이 지나간 문장’. 평소 밑줄 긋기를 좋아해 책방 이름도 <밑줄서점>인 나에게 그날그날 고른 문장을 적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간판 크기와 내 글자 크기를 감안해 그 안에 들어갈 문장을 고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어쨌든 완성된 간판을 책방 입구에 내놓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속속 도착했다. 손글씨가 좋다는 말부터 날마다 이렇게 올려달라는 주문까지. 오호라! 그렇다면 태그를 걸어 매일 하나씩 올려야겠다고 작심했다. 책방을 지나는 사람들이 무슨 내용인가 궁금해서 발걸음을 멈추길 바랐고 누군가가 찍어서 우리 책방 태그를 걸어 SNS에 올려주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했다. 

     

    ©밑줄서점 인스타그램

     

     

    아니나 다를까 단골손님이 자신의 엄마가 책방 입간판 글귀에 관심을 갖고 있다며 꾸준히 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당연하죠! 별로 어렵지도 않습니다요, 했던 나의 당당함은 어디로 가고 3일쯤 지나자 슬슬 일처럼 부담스러웠다. 일이 맞긴하지만 날마다 문장을 찾아서 전날 쓴 걸 지우고 내놓는 일이 다소 귀찮아져 책방에 출근하면 간판을 내놓지 않고 업무를 시작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카페 입간판도 처음 쓴 메뉴와 카피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그 문구가 그대로 적힌 채 직원에 의해 날마다 카페 앞에 내놓아지고 있었다. 내 가게 같으면 그거 내놓지 말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초라해진 칠판에 나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언니나 직원은 그 간판은 처음부터 내가 쓰기 시작했으니 내 몫이라 여기는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것에서 자괴감을 느꼈다. 내 안에서는 나의 작심삼일을 탓하는 또 다른 자아가 날 다그치기 시작했다. ‘그냥 쓰면 될 일이잖아? 써, 그냥 쓰라고! 카페 간판에는 메뉴를 좀 바꾸고 다른 면에는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이세요? 그렇다면...’으로 문구를 바꾼다 한들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 책방 간판도 그래. 네가 창작한 문장을 쓰는 것도 아니고 책에서 좋아하는 문장을 베껴 쓰는 것뿐인데 왜 그렇게 미루고 있는 거야?’


    아니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책에서 문장을 고르는 일에도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무턱대고 내가 좋은 문장만을 쓰면 공감을 일으키기 힘들 수 있으니 가급적 많은 사람이 좋아할만한 문장을 찾아야했고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문장은 또 자제해야 했다. 장사를 하다보니 괜히 간이 콩만해져서 뭔가 시비가 생길 수 있는 일은 만들기 싫었다. 결국 이 모든 건 잘하고 싶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생각이 너무 나간 것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이 모든 것에 나의 귀차니즘까지 더해져서 에잇 오늘은 간판 내놓지 말자,가 됐다. 급기야 내가 왜 타이틀을 ‘오늘’ 밑줄이 지나간 문장 이라고 잡았나?까지 이어졌다. ‘오늘’을 빼고 ‘밑줄이 지나간 문장’이라고 할 걸. 그럼 어제 쓴 걸 그냥 내놓아도 큰 문제가 안 될 텐데. 

     

    마흔 둘의 나를 되돌아봤다. 맞아, 나는 날마다 꾸준히 하는 걸 버거워하는 애였지. 나이 들어도 안 바뀌는구나. 뭘 그렇게 매일 해보겠다고 큰소리를 쳤을까? 날마다 안 하면 어때서? 방점을 ‘매일’이 아니라 ‘한다’에 찍으면 되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참 다행이란 생각까지 미치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이만한 일에 자괴감을 느낄 필요 없다. 나는 매일 뭔가를 꾸준히 하는 것을 버거워하는 나를 새삼 인정하고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칠판을 내놓지 않는다. 


     

    글. 이유미

    약 18년간 직장 생활을 했고 그중 절반을 29CM 헤드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2019년 말 생애 최초로 자영업자가 되어 현재 ‘밑줄서점’을 운영 중이다. 그렇게 소원하던 책방 주인이 되어 달큰하지만 살짝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생각만큼 손님이 오지 않아 책방을 대부분 개인 작업실로 이용하며 책방을 지켜내기 위해 갖가지 다른 일들을 하고 있다. 책을 쓰고 브랜드 슬로건 작업을 하며 때때로 카피라이팅 강의를 한다. 좋아하는 일을 오랫동안 하기 위해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 요즘, 그래도 책으로 가득한 책방에 앉아 읽고 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

    《일기를 에세이로 바꾸는 법》 《문장 수집 생활》 《잊지 않고 남겨두길 잘했어》 《그럼에도 내키는 대로 산다》 《사물의 시선》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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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사진 출처 

    밑줄서점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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