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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괜찮아. 지키지 않는 것까지 계획이야 by 최현정
    아하 에세이 2021. 6. 16. 11:40


    회사 동료들과 서로의 MBTI를 공개한 적이 있다. 각자의 성향과 매치하며 “오~ 맞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와 같은 동조의 대화가 오가던 중, 나의 결과를 공개한 순간 한쪽 구석에서 후배의 실소가 터져 나왔다. “뭐야~ MBTI 이거 안 맞네~. 선배가 그런 사람일 리 없잖아요!”
    밝히자면, 테스트 결과 나는 INTJ 즉, ‘용의주도한 전략가’로 분류되었다. 두 번 세 번을 다시 해 봐도 결과는 같았다. INTJ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따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한 달 안에 3kg을 빼겠다며 설레발 다 쳐놓고 저녁에 누구보다 공격적으로 곱창을 먹는 나. 일주일에 3번은 30분 이상 걷기로 결심하고 조금만 피곤해도 “택시~”를 외치는 나. 매일 한 챕터씩 책 읽기를 하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유튜브에서 아이돌 무대만 찾아보다 잠드는 나를 알고 있는 후배라면 MBTI의 공신력을 문제 삼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후배야, 미안하다! 내 생각에 MBTI는 정확한 것 같다!

    후배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면, 나는 정말로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굳이 변명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후배가 지금껏 보아 온 나의 허술하고 나태한 모습 역시 철저한 계획 아래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지키지 않는 것까지 계획하는 것이다. 
    계획은 이론이고, 실천은 실전! 이론과 실전은 엄연히 다른 것이며, 상극에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계획을 세우는 시점엔 변수가 없지만 실전에는 항상 변수가 존재한다. 생각지 못한 다른 일정이 계획된 일정을 치고 들어올 수도 있고, 급격한 컨디션 난조로 계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오랜만에 연락 온 친구의 급번개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우연히 본 TV 예능이나 유튜브 영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아무리 계획형 인간이라도 이런 변수까지 계획할 순 없으니 우리가 마음먹은 수많은 계획들은 작심삼일로 끝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획형 인간이라면 알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이 계획을 지키지 않았을 땐 다른 이들보다 훨씬 고강도의 스트레스를 받는다는걸. 그러니 처음부터 다 지켜낼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사람은 예상한 사건에 대해서는 덜 좌절하고 덜 슬퍼하는 법이니까. 


    게다가 혹여 내가 기적적으로 오늘 마음먹은 바를 계획대로 착착 진행했다면 그건 예상 밖의 수확이 된다. 언제나 그랬듯 계획 실패로 인해 내일도 스케줄에 쫓길 거라는 예상을 뒤집게 되어 갑작스레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할 수 있고, 스스로에 대한 벅찬 자긍심까지 갖게 되니 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수확을 얻을 때 더 기뻐하는 법이다. 

    잠깐! 그렇다면 지키지도 않을 계획을 굳이 왜 세우냐고 누군가는 반문할 수도 있겠지. 그 질문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우리는 계획을 다 수행해내는 1보 전진은 못할지언정, 그 실패의 과정에서 각자의 깨달음을 얻으며 반 보 정도는 전진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나에게도 굳게 마음먹고 덤벼든 일들이 있었다. 그 첫 번째는 평생 취미 만들기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 몇 가지를 두고 몇 달을 고민했다. 골프는 비싸서 패스! 수영은 수영복 입는 게 부담스러우니 패스! 결국 나의 최종 선택을 받게 된 건 테니스였고, 나는 테니스 운동화와 운동복까지 사서 야심차게 수업을 수강했다. 그리고… 예상 가능하게도 한 달 만에 수강을 포기했다. 그간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일요일 아침 수업 시간에 맞춰 일어나기가 힘들어서였다. 그러나 초라한 결말 끝에도 수확은 있었다. 테니스를 배우는 한 달 동안 선생님으로부터 팔다리 길이는 사라포바 같다며, ‘최라포바’라는 극찬을 들었으니까. 그때마다 직장생활로 쭈글쭈글 찌그러진 자존감은 다리미로 다리듯 쭉쭉 펴졌다. 

    몇 년 전 대뜸 휴직을 했을 땐, 제2의 직업을 찾겠다며 가죽 공예 수업에 등록했다. 당장 내일도 예측할 수 없는 회사 스케줄, 사람을 갈아 넣는 업계의 관행에 지치기도 했고, 직장인이란 언제 잘릴지 모르니까 이 시한부 직장 생활을 때려치울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기초 수업에서 두꺼운 바늘을 가죽에 밀어 넣는 짓을 반복하다 보니 엄지손가락의 고통이 어마어마한 것이다! 그 고통을 이겨내고 창조해낸 결과물의 초라함을 마주하노라면 내가 도전한 일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고민만 커졌다. 결국 1주일에 세 번 가던 수업은 1주일에 한 번으로 줄어들더니 서서히 가죽 공방에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그 실패를 통해 내가 만드는 행위엔 재능이 없는 것을 깨달았고, 덕분에 엄한 일에 도전을 하며 더 이상 시간과 돈 낭비를 하지 않게 되었다. 만약 이 도전을 해보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가죽 공방을 운영하며 밥벌이를 할 거라는 헛된 희망을 갖고 지금의 직장 생활마저 헐렁하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나마 할 줄 아는 밥벌이가 지금 다니는 직장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회사의 존재가 고마워졌다. 

    시작은 늘 창대했으나 결말은 미약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실패에도 스스로를 의지박약이라고 자책하지 않는다. 시작할 때부터 중간에 그만둘 것이라는 것을 내심 예상하고 있었고, 말했듯이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으며 반 보 전진했으니까. 

    허술하게. 미심쩍게. 꺼림칙하게. 계획에 여백을 만들자. 도망갈 구석을 마련해 두자. 실패까지 계획의 일부로 포함시키자. 아이러니하게도 지키지 않는 것까지 계획할 때 우리는 그 계획을 성실히 지킬 수 있다. 매번 작심삼일로 끝나는 일도 매일 꾸준히 해내는 일이 된다. 


    비겁하다고 손가락질해도 어쩌랴. 나는 내 계획에 여백을 만들고, 이 여백의 미가 꽤 마음에 드는 걸. 

    ©최현정
    ©최현정

     

     

     

     

    글. 최현정

    전작 『빨강머리N』을 출간해 인세로 먹고사는 삶을 사나 했으나, 여전히 9시 출근, 칼퇴근, 칼연차를 도모만 하는 카피라이터 직장인이다. 10년 남짓 광고 회사를 다녔지만 광고가 가장 어렵다는 사람. 낮에는 회사에서 카피를 쓰고 밤에는 집에서 카툰을 그리는 사람. 마음은 아직도 신입사원인데 얼굴에선 연차가 보이는 사람. 당장 벌어질 일도 예측 못하면서 먼 미래부터 걱정하는 사람. 오늘은 정말 회사 때려치운다 말하고는 내일이 되면 또다시 출근하는 사람.

     

    지은 책 중에서 추천해요!

    『싫다면서 하고 있어 하하하』

    빨강머리N의 지랄맞은 밥벌이에서 발랄하게 살아남기 

    이미지를 눌러 책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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