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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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과 에베레스트 by 도대체아하 에세이 2022. 1. 7. 14:39
어쩐지 자꾸만 헷갈리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아는 단어인데 입에서 나올 때는 음절의 순서가 뒤섞이는 단어들입니다. ‘에베레스트산? 아닌가, 에레베스트산인가?’, ‘스튜디어스? 아니 참 스튜어디스인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한번 헷갈리기 시작하면 이후로는 더 자꾸 헷갈리기 쉽습니다. 세간에는 ‘노인코래방’과 ‘알르레기’, ‘멸린말치’와 ‘야치참채’ 같은 단어도 떠돌고 있죠. 이런 것을 보면 제법 흔한 현상인 것도 같습니다. 학창 시절에 국사를 배우면서 저에게는 그런 단어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바로 ‘근초고왕’입니다. 백제의 제13대 왕이자 강력한 고대 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며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는 근초고왕. 중요해서 시험 문제로 나올 확률도 높은 인물이었죠. 그래서 ‘근초고왕’ 네 글자를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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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매는 날들 by 도대체아하 에세이 2021. 11. 26. 15:06
어느 날 친구가 저에게 적성검사를 받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적성검사라니, 참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습니다. ‘이 나이에 웬 적성검사여?’ 싶었는데, 친구 말로는 주위의 학부형 여럿이 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초등학생 자녀들이 적성검사를 받고 결과가 나오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나도 한번 받아볼까?’ 하게 되는 거라네요. 친구 역시 검사를 받으려고 마음먹은 참이라고요. 중년이 되어서도 자신의 적성이 궁금하고, 지금보다 더 잘 맞는 일이 있지는 않은지 궁금한 이들이 많은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뜬금없는 고백이지만, 저는 학창시절에 수업을 제대로 듣는 것이 몹시 어려운 학생이었습니다. 그건 저의 잘못이기도 하고 잘못이 아니기도 했는데, 아무리 수업을 열심히 듣겠다고 마음먹은 시간이어도 불가항력처럼 이내 딴생각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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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로 살란다 by 도대체아하 에세이 2021. 10. 28. 15:42
초등학생 때 만난 어느 담임선생님은 종종 갱지를 나눠 주고 “3등분으로 접으세요”라고 주문했습니다. 세 구역으로 나뉜 종이에 선생님을 따라 필기를 하기도 하고, 간단한 쪽지 시험을 보기도 했죠. 저는 그 시간을 은근히 기다리다가, 선생님이 지시하면 마음속으로 즐거워했답니다. 종이를 자로 재지 않고도 3등분으로 접는 것엔 자신 있었거든요. 어쩐지 그것이 아주 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종이를 후다닥 잽싸게 접은 다음 짝꿍의 종이도 접어주고, 앞뒤에 앉은 친구들이 내미는 종이도 접어주었습니다. 아직까지도 그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제가 얼마나 뿌듯했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학년이 점점 올라가면서 종이를 3등분으로 접을 일은 점점 줄었습니다. 사회로 나오니 그럴 일이 전혀 없다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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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해? by 도대체아하 에세이 2021. 9. 3. 09:33
이 집에 이사 온 지 어느덧 반년도 더 지났습니다. 이사할 즈음 저는 당장 급히 해결해야 하는 다른 일들로 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던 터라, 이사에 크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이삿짐만 다 들여놓은 후에, 나머지는 살면서 손보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고는 반년이 후딱 지나버렸습니다. 짐작들 하셨겠지만, 반년이 지난 지금도 저희 집은 ‘이삿짐만 다 들여놓은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장 급히 해결해야 할 일들’이 도무지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면 저 일이 기다리고 있는 날들의 연속이죠. 그래도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이런저런 정리를 해왔지만 제가 바라는 그림과는 거리가 영 멀기만 합니다. 일단 거실 벽 한쪽에 둔 커다란 수납장부터 문제입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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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브를 춰봐요 by 도대체아하 에세이 2021. 8. 9. 10:49
제가 대학생이던 시절, 봄마다 열리는 대학 축제 기간엔 각 과와 동아리들이 교정 여기저기에 천막을 펼치고 주점을 운영하곤 했습니다. 소주며 막걸리와 함께 파전이나 순대볶음처럼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음식을 팔았답니다. 가끔 학생들과 친한 교수님들이 주점에 방문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학생들이 손님이었죠. 주점 앞에 놓인 탁자나 아예 바닥에 깔린 돗자리에 옹기종기 앉아서 술을 마셔대곤 했습니다. 온 학교가 거대한 주점이 되는 기간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주점이 아니어도 학생들이 함께할 재미난 활동이 많았을 텐데, 아무래도 상상력이 부족한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어쨌거나 제가 있던 동아리에서도 주점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학교로 가는 제 마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그날 낮에 막, 썩 좋지 않은 일을 겪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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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빅!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몸이라고요 by 박소연아하 에세이 2021. 7. 22. 11:07
고등학교 때 일이다. 간밤에 심해진 복통으로 고통스러워하던 나는 울상이 된 채로 등굣길에 나섰다. 몸을 펴지도 못하고 기어가듯 걷다 보니 갑자기 울컥, 짜증이 올라왔다.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해야 해? 약도 먹었잖아! 몸에게 누가 주인인지 보여주겠어.’ 그리고는 복통으로 펴지도 못하는 몸을 억지로 곧게 세우고 학교까지 전력 질주해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쥐어뜯기는 통증이 올라왔지만 무시했다. 그렇게 십 분쯤 달려 학교에 도착하고 나서 내 몸을 확인해보니 복통이 마법처럼 사라진 게 아닌가? 나는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교문을 통과했다. ‘역시 마음을 굳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법이야.’ 그때의 어린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이런 부류의 믿음은 삶에서 오랫동안 이어졌다. 졸리더라도 눈을 비비며 전공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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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의 징검다리 by 도대체아하 에세이 2021. 7. 14. 14:38
책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를 내고 첫 북토크를 할 때였습니다. 제 인생의 첫 북토크였던 데다가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무척 긴장했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겨우 이야기를 마치고, 이윽고 참석하신 분들과 대화하는 순서가 왔는데요. 그중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공연이나 전시회처럼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다니는 편이고 그로 인해 즐거워지는 것은 맞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이면 ‘이게 뭐라고…’라는 생각이 들면서 허무해지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을 기억하는 이유는 제가 썩 좋은 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잠깐 생각하고는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죠.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어쩔 수 없다니, 한심한 답변 아닌가요. 그런 답을 듣기 위해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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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의 작심삼일 by 김재식아하 에세이 2021. 6. 30. 15:13
# 어느 날 오후, 알고는 있지만 친하지 않은 낯선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응? 뭐지? 이 친구가 왜 나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라는 생각에 통화를 망설였다. 모임에서 종종 만나기는 하지만 직접적인 대화는 해본 적이 없는 터라 오만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게 그 친구의 첫 전화는 부재로 남았다. 몇 주 후 일과로 정신이 없던 날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지난번 연락했던 친구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못한 게 미안하기도 하고 좀 불편하게 느껴졌다. 다음에 만나면 이야기하겠지 하고 넘겼는데, 나중에 다른 친한 동생에게 연락이 와 어제 연락을 받지 못한 친구가 내 걱정을 하더라고 했다. 동생은 내가 바빠서 연락을 못 받았을 거라며 둘러댔다고 했다. 그제야 좀 ..